나의 이야기

해군본부 502정 Yard class Marine Sweeper YMS502(경주)

덕산연담 2018. 9. 21. 15:18

 

 

드디어 한국 해병대 차례가 왔다.
미 해병대 2개 제대의 월미도 상륙에 이어, 오후 만조시간을 이용해
본대가 상륙하게 된 것이다.


H-아워(공격 개시시간)를 2시간여 앞둔 15일 15시 30분 긴급 대기명령이 떨어졌다.
상륙함(LSD)에서 내려진 상륙주정(LCVP)이 수송함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해병대 장병 여러분, 오늘 우리는 드디어 상륙작전을 감행하게 됐습니다….
이 작전은 우리 조국을 불법 침략한 공산 괴뢰군을 분쇄하고, 위기에 처한
조국과 민족을 구해 정의와 자유를 회복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함포 사격속 일제히 해안으로 돌진

상륙을 앞둔 해병대원들에게
작전의 의미를 강조하는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의 함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미군 수송선에서 한국 해군참모총장의 목소리가 나오는 데에 감격한
해병용사들은 또 한 번 분골쇄신할 각오를 다졌다.
손제독의 방송에 이어 신현준 해병대사령관의 훈시가 뒤를 이었다.
‘귀신 잡는 해병’의 용맹을 강조하면서, 이번 작전에서도 그 전통을 이어 가자는 당부였다.

전 대원은 주먹을 불끈 쥐고 굳게 다문 입술에 또 힘을 주었다.
드디어 공격개시 시간인 18시가 됐다.
상륙주정에 승선한 한국 해병대의 출진에 맞춰 우리 해군 함정들도 일제히 포격을 시작했다.
이 작전에 참가한 한국 해군 함정은 15척이었다.
PC 4척(701·702·703·704함), YMS 소해정 7척(501·502·510·512·513·515정),
JMS 소해정 4척(302·303·306·307정) 등 해군이 보유하고 있던
함정이 총출동했다.

나는 이날 아침 제1제대의 상륙을 지원할 때보다 더 들뜬 마음으로 함포사격에 참여했다.
그때 나는 사실상 704함을 지휘하고 있었다. 덩치가 큰 유엔 함정들이
연안에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는 약점을 알고 있었던 나는, 인천 내항 깊숙이 들어가
눈에 익은 목표물들을 향해 귀청이 찢어지도록 함포를 쏘아댔다.

유엔군 함정들도 일제히 포문을 열었고,
함재기들이 새카맣게 날아가 공중폭격을 퍼부었다. 이에 힘을 얻은 듯
우리 해병대가 용감하게 만석동 해안으로 돌격해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준비된 사다리를 안벽에 걸쳐 놓고 줄지어 타고 올라가 해안 교두보를 넓혀 가는 모습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해안 저쪽의 시가지는 시뻘건 불바다였다.
저녁놀이 들기 시작한 초가을 인천
시가지 하늘은 주황색 불꽃과 검은 연기, 푸른 하늘색이 잘 조화된 화려한 유화(油畵)였다.
해안 교두보에서 밤을 보낸 해병대는 16일 미명 교두보를
시가지 쪽으로 넓혀 가는 작전을 개시했다.
인천 시가지 곳곳에는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 널려 있었다.
13일부터 시작된 포격과 공습에 쫓겨 가면서 적은 억류 중이던
우익인사와 양민들을 살해한 것이다.

작전 한달만 늦었어도 '난공불락' 요새

경찰서 방공호 속에서, 동네 우물 속에서 시신이 겹친 채로 발견됐다.
아직 연기가 나는 민가에서도 시체가 나뒹굴었다.
이날 나는 작전경과를 묻는 기자의 인터뷰 요청에 응했다. 인터뷰는 ‘장관(壯觀) 인천상륙작전-아(我)해병대 영웅적 분전’이라는 제목으로
부산일보 17일자에 크게 실렸다.

해안 교두보가 확보된 뒤 나는 704함을 부두에 정박시키고,
잠시 짬을 내 월미도로 달려갔다. 비어 있을 관사지만 내 신혼의 단꿈이 배어 있는
보금자리의 안부가 궁금했다. 함포사격과 공중폭격으로 파괴됐을 줄 알았던 관사는
인민군들의 방화로 잿더미가 돼 있었다.

맥아더 장군은 이날 오후 늦게 월미도에 상륙해 격전지를 둘러보았다.
견고한 요새 구축 현장을 보고 그는 “작전을 서두르기 잘했다”고 말했다.

D - 데이(작전개시일)를 1개월만 늦추었으면
월미도는 난공불락의 요새로 변했으리라는 말이었다.

<공정식 前해병대사령관 정리=문창재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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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초의 관함식(觀艦式)은 1949년에 열렸다. 우리 해군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1주년을 기념하고, 발전된 해군 모습을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 1949년 8월 16일 인천 해상에서 관함식을 개최했다.

해군은 정부 수립일 다음 날을 행사일로 정하고, 이희정 중령을 편대기동훈련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이 중령은 YMS-509 가평함을 기함(旗艦)으로 정한 뒤 YMS(Yard class Mine Sweeper·소해정)로 편대를 구성해 사격훈련을 비롯한 훈련을 연습시켰다. 훈련 함정은 가평함을 필두로 YMS-502(경주), YMS-505(김해), YMS-506(강계), YMS-507(강릉), YMS-510(강경), YMS-512(구월산), YMS-513(김천), YMS-516(공주) 등 9척이었다.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이 이승만 대통령을 안내해 기함에 탑승하자 편대기동훈련이 시작됐다.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각료, 국회의원 등 각계 인사와 인천 시민들은 함정·부두에 집결해 편대기동훈련을 참관했다. 특히 단종진(單縱陣·함정이 일렬로 항진하는 형태)으로 항진하면서 실시한 37㎜ 함포 사격은 훈련의 백미로 큰 호응을 얻었다.

이날 행사는 대한민국 해군이 국군의 구성원으로서 국가와 국민을 위해 싸울 수 있다는 것을 군(軍)통수권자인 대통령과 국민에게 인식시킨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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