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법전의 장엄물이 이렇게 아름답고 화려하다. 부처님 당시의 위용을 만나는 듯하다. 내가 언젠가 꿈(?)에서 보았던 서방정토 극락세계 아미타부처님이 계신 곳과 꼭 닮았다. 나는 처음에 이러한 장엄물을 보면서 비싼 돈을 들여서 왜 이렇게 만드는지가 궁금했다. 금강경에도 마지막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게송이 나온다.
...형상으로 나를 찾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한다면, 그 사람은 헛된 짓을 하는 것이니, 결코 나를 보지 못하리라
참으로 아니러니가 아닐 수가 없다. 소의경전이라면 그 뜻에 따른다는 다짐이고 그 경은 속세의 헌법과 같은 역활을 하는 것이다. 우리 나라 대표적인 종단인 조계종의 소의경전은 '금강경'이다. 경의 가르침은 가르침이고 현실은 현실이란 말인가?...
나의 이러한 궁금증은 이런 말을 듣고서 풀렸다.
...깨달음을 이룬 그 행복한 극락 세상을 가 본 적이 있는가? 거기의 세상은 이렇게 생겼다네...부처님은 금빛으로 빛나고, 나무는 유리 보석으로 되었고, 새는 극락조가 아름다운 소리을 들려주고,...죽음도, 태어남도, 늙음도, 또한 아픔도 없는 그런 곳이라네...그런 세상을 여기에 만들어 놓은 것이니 잘 보고 잘 새겨 두게나. 바로 여기가 아미타세상이라네...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잘 먹고, 사랑도 해본 사람이 더 잘 한다고 한다. 행복한 사람이 더 행복해지고 극락세상의 아는 사람이 결국은 극락에 가리라. 그런 깊은 뜻을 담아 이렇게 멋진 세상을 우리에게 형상으로 선물을,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자주 가서 보고 절하고..그리고 느껴야 하리라. 나는 지금 아미타부처님의 극락세상에 살고 있음을...
다른 절에서는 못 보던 도깨비의 얼굴이 설법전의 들보에 그려져 있다. 뿔이 두 개가 나있고, 흰 수염과 무서운 이빨...작은 눈과 빨간 코가 인상적이다. 도깨비가 나타나면 뚝딱하고 세상을 내가 원하는대로 바꾼어 준다고 옛날 할머니는 이야기 하면서 은근 나타나길 기다렸다. 재물을 가져다 주고 무엇인가 선물을 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한편에서는 처용이라는 아랍인의 모습을 처음 본 사람이 그 사람을 그려 달라고 부탁해서 화공이 상상 속에서 그린 아랍인이라는 설도 있다고 한다. 그들이 들고온 문물과 돈이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큰 충격이었을 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는 내가 좋아하는 도깨비를 여기서 보게 되어서 반가웠다.
이렇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자리에 우리는 방석을 펴고, 모든 살아있는 또한 모든 살아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어지는 세상의 생명들에게 자비로운 아버지이시며 (사생자부), 우리의 최초 스승님 (시아본사)이신, 석가족에서 태어나 깨달음을 얻으신 위대한 분(석가모니불) 께 목숨이 다 할때 까지 마음을 기울여 의지 할 것(지심귀명례)임을 가장 낮은 자세(오채투지)로 맹세하면서 우리의 순례의 저녁 예불을 멋지게 해 나아갔다. 얼마나 감격스럽고 아름다운 일인가~!! 모두가 한 마음으로 목탁에 맞추어서 땅에 이마를 대고 그 분의 위대한 자비를 기억하고 자비로움을 구한다. 자비로움...참으로 기가 막힌 말이다.
그 다음에 이러지는 큰 스님, 법진 스님은 이렇게 법문을 하시며 우리를 다독였다.
...나는 세상과 다투지 않는 법을 설 합니다.
중아함경중에 나오는 '꿀덩어리들'에 나오는 법문이라고 하시며 손수 번역하신 책을 선물로 주셨다. 어제 석가모니 부처님을 보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 처럼 신선하고 유쾌했다. 내가 원하는 법문이라서 일까? 스님이 아주 멋지게 보였다.
...내가 지금 하는 생각이나 보이는 것들 등등은 내가 투영한 허상일 거라는 생각을 해라. 그러면 다투지 않는다. 라고 요약하고 자세한 설명을 해주신다. 마음에서 작은 환희심이 나온다. 맞다. 그게 그 말이었구나...하하.
탄트라의 가르침 첫 구절에 나오는 말이다.
부처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 순간을 혼란 속에 살던 아니면 착각 속에서 살던 상관없이 우리 인간의 근본적이면서 본질적인 특성은 깨끗함과 순수함이다. 비유하자면 구름들이 잠깐 동안 태양에서 나오는 빛을 가릴 수는 있어도 손상시킬 수는 없는 것처럼, 몸과 마음에 생긴 임시적인 괴로움들-혼란, 염려, 그리고 이것들이 원인되는 고통- 역시 임시로 우리의식의 근원적인 깨끗한 특성을 흐리게는 하지만 파괴하거나 심지어는 접촉조차도 할 수가 없다. 우리의 심장 속 깊게 그리고 모든 존재들의 가슴 안에 살아 남아있는 것은 끊임없이 써도 없어지지 않는 자비스러움과 지혜로움의 샘이다. 그리고 모든 정신적인 수행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것을 부처의 가르침이라고 하든 아니하던, 이런 본질적인 순수성을 찾아내서 그것과 친해지는 것이다.
우리가 소유한 내안의 순수, 내안의 연민, 그리고 내안의 자비로움을 개발한다면, 그러면 다른 사람들 안에 들어있는 이러한 순수함 과 자비스러운 친절함의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 내부에 존재하는 이러한 수준 높은 성향과 친하지 못하다면,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추악하고 편협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매일 보는 바깥세상의 모든 것들이 실제로는 우리가 지닌 내안의 세상대한 투영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