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란 결국 욕망의 노예가 되어 삶의 참뜻을 깨닫지 못하고 질곡과 고통 속에서 헤매게 됩니다. 그러므로 욕망에서 해방되는 길을 찾아 스스로의 행복을 누리는 인생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가난 속에도 행복은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지안스님 에세이 설법중-
이글을 읽고는 아니다 싶은 생각이 일었다. 욕망이라는 관점을 '노예'또는 '해방'이 되어야하는 과제로 삼았고 또한 '행복' 또는 '가난'과는 반대되는 말에 두었다. 이또한 남의 이야기이거나 그냥 생각나는 대로를 적은 듯하다. 소위 깨달은 사람이라는 '아라한'의 관점에 보면 모두가 즐거운 대상이다. '나'라는 생각이 없는 상태에는 말이다.
지난친 욕망을 가진 자는 한편 매우 에너지가 높은 크나큰 동기를 지니고 사는 삶이다. 깨닫기전 왕자시절 싯달타 태자가 그랬다. 그 욕망이 얼마나 지나치게 커서 괴로웠는가? 다행이도 그 에너지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방향으로 해소가 되었다. 오히려 불교적인 관점에서는 '욕망을 절제하라'는 대신에 '욕망을 더 많이 부려라, 단 그 욕망에 얽매이지는 말아라'라는 가르침이 더 옳다고 생각한다.
뇌가 곧 깨달음이라고 하고, 중생이 부처라고 한다. 이 말은 엄청 모순이다. 하지만 조건이 있는 매우 한정적인 말이다. '번뇌가 번뇌인지를 알고 거기에 매이지 않는다면 그 것이 곧 깨달음이다'라는 해석이 있어야 하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중생이 가지고 있는 불성을 확연히 들어내면 그대로가 부처이다'라는 말이다. 깨달음이라는 현상이 저멀리 있거나, 부처가 아주 다른 제 3의 존재가 아니다.
욕망이라는 말은 우리가 부처로 살아가는 토양이며 원동력이다. 가능하면 욕망하고 가능하면 자기의 에너지를 불태우라. 다만 그것에 얶매이지는 말고...그러면 그대가 하는 모든 것이 바로 행복이고 부처님의 나라, 더 바람이 없는 그런 세상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