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에서 주장하는 생각을 떠난, 생각으로 알 수가 없는 경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상(相)이라는 말이 나온다. 원래 인도에서는 무슨 말이었기에 그렇게 번역을 한 것인지 궁금하던 차에 각묵스님 지음 금강경 역해 (불광출판사) 76 쪽을 옮긴다. 원어는 산냐(Samjna)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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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냐 는 산(Sam-함께)와 냐(Jna-인식(to Know))의 명사이다. 어원적으로 보면 '같게 인식하는 것'이라 해야 하겠다. 즉 a1, a2,...의 경우를 보고 a 라고 뭉뚱그려 인식하는 행위라고 보면 되겠다. 즉 여러 가지 다른 종류의 종이로 만들었으며 그 안에 글이 적혀있고, 제본이 되어있는 그 무엇들을 보고 책이라고 이름 붙이면서 개념작용을 일으키는 경우와 같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산냐를 문자 그대로 합지(合知)라 이해하면 될 것이다. 대상을 받아들여 개념(Notion)작용을 일으키고 이름 붙이는 (Naming)작용을 기본적으로 산냐라 한다고 이해하면 된다.
초기경들에서 산냐는 별달리 정의된 말이 없다. 단지 푸르다고 아는 것, 누르다고 아는 것, 붉다고 아는 것, 희다고 아는 것을 산냐라고 한다고 되어있다. 그래서 영어에서는 Perception(인식)으로 옮기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단순히 인식하는 정도의 영역을 나타내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초기경만 봐도 더 깊은 심적인 영역을 나타내는 술어로 쓰이고 있다는 점이다. 심리 용어에 착안하여 요즘 몇몇 서양학자들은 Appreception(통각)으로 옮기기도 한다.
역자가 조사한 바로는 초기장경에서만 이 산냐라는 단어가 6800번 이상 나타난다. 그 정도로 많이 쓰이는 술어이다. 물론 이 중에서는 3500번 정도는 모두 오온의 세 번째로서의 산냐로 나타나지만 나머지 경우, 특히 합성어로 나타나는 산냐는 주로 수행 중의 경계와 관련되엇 나타난다 할 수 있는데 아주 의미심장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 초기경에 나타나는 산냐에 대해서는 부록을 참조하기 바란다.
본 경에서도 산냐를 단순히 인식의 차원 정도에서 이해하면 본경의 키워드인 산냐의 심대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울 것이다. 구마라집이 산냐의 일반적인 한문 역어인 상(相-생각할 상)으로 옮기지 않고 (현장은 모두 想으로 옮기고 있다) 相으로 옮긴 것은 아주 고심한 끝에 내린 결단이라고 본다. 본 경에서 그냥 想 정도의 의미로만 산냐를 보기에는 더 심오한 뜻이 있기 떄문이다. 구마라집이 산냐를 想이 아닌 相으로 옮긴 점은 정말 안목이 수승하다. 단순히 인식하고 생각하고 상상하고 마음을 궁글리고 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마음에 어떤 모양(相)을 굳게 그리고 만들어 가지고 있는 상태를 산냐로 파악한 것이다. 그 마음에 굳게 그리거나 만들어 가지고 있는 것을 우리는 다름 아닌 이년, 이상, 관념, 고정관념, 경계 등으로 부를 수 있다. 사실 초기 경전에서도 이런 의미로 산냐가 쓰이는 경우가 많다. 특히 합성어로 나타나는 경우는 대부분 다 그렇다.
예를들면 무색계 사선으로 인식되고 있는 사처(四處,Ayatana)는 모두 이 산냐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다. 즉 공무변처(空無邊處)는 공무변처 산냐로 나타난다. 허공이 무한하다는 산냐를 수행 중에 만나서 그 경계에 주저앉아 있는 경우를 말한다. 그래서 이 공무변처 산냐는 다음의 식무변처(識無邊處)로써 극복하고 식무변처에 주저앉아 생기는 식무변처 산냐는 다시 무소유처(無所有處)로 극복하고 무소유처에 안주해서 생기는 무소유처 산냐는 비상비비상처(非相非非相處)로써 극복하고 이 산냐도 산냐도 아닌 것도 아닌 비상비비상의 경계는 상수멸(相受滅). 즉 산냐와 느낌이 완전히 해소된 경지로써 극복하는 것을 초기경에서는 많이 설하고 있다.
여가서 알 수 있듯이 이 산냐 놀음의 최상은 산냐인 것도 아니고 산냐 아닌 것도 아닌 경지 즉 비상비비상처요, 여기서는 산냐놀음이 극대화되고 있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이러한 산냐 놀음을 완정히 벗어난 경지로서 '산냐웨다이따니로다' 소위 말하는 상수멸(相受滅)을 설하셔서 이런 외도선에 빠져있는 수행자들을 제도하신 것이다. 그 외 수꾸마삿짜산냐, 즉 긴리에 대한 미세한 산냐등 수행에서 나타나는 경지를 묘사한 경우가 허다하다. 문제는 이러 산냐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한다는 데 있고, 세존 이전의 모든 수행자들이 이 산냐놀음에 빠져서 그 경지가 최상이라 우기고 즐기고 안주하였지만 세존께서는 결연히 그것이 단지 산냐일뿐임을 철저히 아시고 홀로 길을 찾아나서서 드디어 이 문제를 해결하고 법을 선포하신 것이다. 불교가 불교인 것은 바로 이 산냐에 속지 않고 산냐를 극복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82페이지)
오늘 우리 한국불교를 돌아보자. 말로는 무아, 무아 하면서도 무아의 참된 의미를 두고 고뇌하거나 사유하는 자는 정말 드물다 할 것이다. 특히 수행에 대해서는 고뇌하는 흔적도 보이지 않고 우빠니샤드의 아류적인 곳에 빠져 자성불, 참나, 견성, 자성청정심, 내 부처 등을 설하고, 그것을 체득하기 위해서 몰입하면서 아뜨만을 거듭 거듭 찬양하고 있는 실정이다. "무아라 해서 아무 것도 없는 것을 설하신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그들은 아뜨만을 역설하는 전도사로 변해버렸다.
왜 부처님이 무아를 역설하셨던가는 차치해두고 부처님이 왜 비상비비상처라는 인도사상과 인도수행에서 최고의 경지라 자부하던 것을 아직 구경의 경지가 아니라 하여 버리고 당신의 수랭을 스스로 해나가셨던가에 대해서 불자하면 수행자하면 한 번쯤은 고뇌하고 서로 탁마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냥 대충 얼버무려서 어물쩍 넘어가기 바쁜 게 우리의 현실 아닌가?
금강경을 매일 독송하면서, 무아상을 거듭 거듭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모두 아상 저 아뜨만산냐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지는 않은가 반성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