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걸림 없이 한바탕 진탕 치고
1929년 어느 날, 한 납자가 덕숭산으로 만공 화상을 찾아와 화두를 내려줄 것을
청했다. 그러나 만공 화상은 단호히 거절했다. 이유는 <머릿속에 든 글이 너무 많아 그것을 버리지 않고는 화두를 줘 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이 납자는 일주일 동안 먹지도 자지도 않았다. 화두를 받기 위해 자기 내면과 치열한 투쟁을 벌인 것이다. 그것은 만공 화상을 스승으로 모시기 위해 행한 최소한의 예의이기도 했지만 참된 공부를 하기 위한 기본적인 자세이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납자는 화상으로부터 무(無) 자 화두를 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어렵게 선문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훗날 당대의 걸승 선객이 된 춘성(春城)이다.
만해 한용운의 유일한 제자로, 스승만큼 아니 그를 휠씬 뛰어넘을 만큼 빼어난 경학 실력을 갖추었던 춘성에게 만공과의 만남은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하기야 경전 중의 최고 경전으로 일컬어지는 『화엄경』을 거꾸로 외웠을 정도로 <화엄경 제일 법사>로서의 명성을 드날렸던 그가 새롭게 선사(禪師)의 길로 접어드는 과정에서 이 정도의 통과 의례를 치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욕쟁이 스님>이라는 별호로 더 많이 알려진 춘성이 만공 화상을 찾은 것은, 은사인 만해 한용운을 일찍 여의고 의지할 데가 없어진데다가 당시 교계에서 가장 큰 선지식으로 추앙받던 만공 화상의 회상에 머물며 가르침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렵게 화두를 받은 춘성은 평생을 무 자 화두를 참구하며 보냈다. 누구든 그를 찾아와 법을 물을 것 같으면 치면 어김없이 조주의 무 자 화두를 내려주었으니, 그에게 있어 무 자 화두는 단순한 화두가 아니라 행동의 지침, 생활 전반의 원칙이었던 셈이다. 그가 오랫동안 머물렀던 망월사를 내려올 때 절에 있던 모든 물건을 태워비린 것이나, 절을 드나들던 궁중 상궁들의 귀한 시주물이나 탱화도 주저하지 않고 내다버린 것은 모두 <없음> 즉 <무>를 실천한 걸림 없는 무애행(無碍行)이었던 것이다.
춘성은 1891년 3월 강원도 설악산 설악동에서 태어났다. 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따라 설악산 신흥사로 불공을 드리러 갔다가 법당에 모셔진 불상을 한동안 뚫어질 듯 쳐다보고는 출가를 하겠다면 부모님의 허락을 구했을 정도였으니 그의 불연을 어찌 한두 생에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으랴. 부모의 허락을 얻지 못해 이때 출가의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지중한 불연은 부모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춘성는 4년 후 13세의 어린 나이에 모든 인연을 과감히 정리하고 백담사로 입산, 만해 한용운 선사와의 운명적 해후를 가졌다. 만해를 시봉하며 10여 년 동안 공부한 춘성은 스무 살 되던 해, 금강산 유점사로 들어가 동선(東宣)화상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고 안변 석왕사에서 대교과를 마친 후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다. 여기서 강학(講學)을 전공해, 최고의 화엄법사(華嚴法師)로 명성을 날리게 된 것이다.
출가 이후 나름대로 탄탄대로를 달리던 춘성이 49세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문득 춘성을 자신이 살아온 지난날을 가만히 돌아보는 기회를 가졌다.
「아, 얼마나 바쁘게 살아온 나날들인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 그러나 지금 달라진 것은 무엇인가. 화엄을 종횡으로 꿰뚫어도, 가는 곳마다 대작 불사를 성취해도 무언가 답답하고 허전한 감이 남아 있음을 털어 버릴 수 없으니.......」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춘성이 만공 화상을 찾아 화두를 청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덕숭산(德崇山) 수덕사에서 만공 화상으로부터 화두를 받은 후 춘성이 보여준 수행 정진은 생사를 건 치열함 그 자체였다.
어느 날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인가(祖師西來意)>를 참구하던 중 만공 화상과의 거량에서 말과 생각의 문이 막히게 되자, 춘성은 다시 한 번 크게 발심하여 정혜사 큰방에서 용맹 정진에 돌입했다. 한겨울에 불도 때지 않은 방에서도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풀지 않았으니 이때 보여준 그의 정진력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참선 수행자들에게 가장 어려운 난관은 졸음을 극복하는 일이다. 춘성 역시 정진하는 도중 자꾸만 몰려오는 졸음을 물리치느라 큰 고충을 겪어야 했다. 눈을 부릅뜨고 정신을 가다듬어도 순식간에 쏟아지는 졸음은 쉽게 극복되지 않았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를 궁리하던 춘성이 어느 날 결심이 섰는지 법당 뒤로 돌아 가 공터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그곳에 커다란 항아리를 묻고 물을 채운 다음 밤마다 그곳에 들어가 머리만 내밀고 정진했다. 삭풍이 몰아치는 한겨울 밤에 물에 들어가 앉아 있었으니, 살을 에는 추위를 어찌 인간의 인내로 견딜 수 있으랴. 그런데도 춘성은 꿈쩍하지 않았다. 산자락을 휘몰아치는 삭풍도, 당장 살점을 갈기갈기 갈라놓을 듯 한 추위도 그의 정진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3년 동안의 결제를 마친 춘성은 어느 날 큰방으로 들며 「이제야 잠의 항복을 받았다」고 선언했다. 이후 그는 자고 싶으면 자고, 자고 싶지 않으면 자지 않는, 잠에 관한 한 자유자재한 경지를 보였다.
춘성은 그 후 전국의 선방을 돌며 무려 25하안거를 성만했으니, 쉰이 다 된 나이에 참선문에 들어와 그가 보여준 정진력은 후세의 귀감이 되고 있다.
중생들을 제도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니던 춘성은 잠시 양주 흥국사에 머물게 되었다. 장좌불와의 정진을 하던 어느 날 춘성은 찰나의 꿈같은 환영을 경험했다. 문득 만공 화상이 나타나더니 오색영롱한 연꽃을 들어 보이는 것이 아닌가. 이를 보는 순간 가로막힌 듯 눈앞을 캄캄하게 했던 <조사가 서쪽으로 온 까닭>을 홀연히 열리는 것이었다. 활연오득(豁然悟得)! 춘성은 순간 대도(大道)를 성취했다는 기쁨에 자신도 모르게 기쁨의 노래를 불렀다.
연화장 세계가 그대로 내 몸 안에 있으니
황하의 모래알처럼 광활한 우주가 곧 내 몸 일세
누군가 만약 내게 따로이 전하는 한마디를 묻는다면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비로자나가 출현했다 답하리
蓮花藏是通身寒 大千沙界是我身 若人問我別傳句 問答卽是出毘盧
우주 그 자체가 부처요, 연화장(蓮花藏) 세계이며 이사(理事)의 분별이 없는 보래 자리요, 주객이 떨어진 본체이므로 영원히 생사가 일여(一如)한 자리라는 뜻이다.
대오(大悟)를 이룬 후 춘성은 가는 곳마다 사자후 같은 음성, 추상같은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안목을 펼쳐 보였다. 설악, 덕숭, 오대산 등 그가 가는 곳에서는 능히 살리고 또한 능히 죽이며(能活能殺), 주고받는 것에 걸림이 없는(與奮自在) 설법이 울려 퍼졌다. 춘성이 머무는 곳에는 수많은 대중들이 모여들어 그의 걸림이 없고 본질을 꿰뚫는 법문을 들으며 혜안을 밝혔다.
춘성은 평생 언행일치를 철저히 지키며 살았다. 무소유의 삶을 살기 위해 언제나 일의일발(一依一鉢), 즉 옷 한 벌과 발우 한 벌을 고수했다. 누군가 옷을 한 벌 가지고 와 입으라고 내놓으면 그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를 훌렁 벗고는 옷을 갈아입었다. 상대가 당황하든 말든 망설이지 않았다. 벗어놓은 옷은 그대로 마당에 가지고 나가 태워 버렸다. 그러니 그에게 옷이 두 벌이었던 순간은 있을 수가 없었다.
춘성은 후학들을 다룰 때도 엄격함을 잃지 않았다. 칠순을 넘길 때까지 단 하루도 이불을 덮지 않았을 만큼 몸과 마음이 느슨해지는 것을 철저히 경계했기 때문에 후학들을 엄격하게 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말년에 망월사에서 주석할 때 춘성은 한겨울이라도 대중들이 따뜻한 방에서 안락하게 자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무릇 수행을 하는 자가 공부를 다 마치기도 전에 어찌 편한 잠자리를 가질 수 있겠느냐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기 때문이다. 간혹 수좌들이 몰래 담요라도 덮고 자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불호령을 내리는 것은 물론이요, 담요도 태워버렸다.
그러다 보니 망월사에은 타버린 담요가 수없이 많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참선하는 수좌가 두꺼운 옷을 입거나 사치품을 사용하는 것도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신도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절에 사치스러운 옷을 입고 왔다가 밍크코트 같은 비싼 옷을 태워버린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상대가 끊어진 절대의 경지에 이른 선지식의 행동에는 본시 일정한 규칙이 있을 수 없는 법이다. 굳이 일관된 것이 있다고 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자유자재일 것이다. 때로는 금방이라도 일어나 덤빌 것 같은 사자 같고, 때로는 비길 데 없이 굳은 금강의 보검 같으며, 또 때로는 세상 사람들의 말문을 막아버리기도 하고, 때로는 때와 장소에 걸맞은 설법을 거침없이 펼쳐 보이기도 하는 게 궁극의 경지를 노니는 선지식들의 행동거지라 할 것이다.
춘성은 후학들에게 자주 「그대들이여! 그대들의 몸뚱이 속에 하나의 자유스러운 무위진인(無位眞人)이 있나니 항상 그대들의 면전에서 출입을 한다. 아직 그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누구라도 이것을 체험하여 깨달아야 할 것이다」라고 당부하곤 했다.
춘성이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는 차 안이었다. 기독교 전도사 한 사람이 나타나 사람 앞을 지나며 예수를 믿으라고 소리쳤다. 그는 삭발염의를 하고 있는 춘성의 앞에서도 전도 행각을 멈추지 않았다.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치근덕거리는 이 전도사를 천하의 춘성이 그냥 보냈을 리 있겠는가?
춘성이 돌연 전도사에게 일갈했다.
「뭐? 죽었다 살아났다고? 나는 여태 죽었다 살아나는 건 내 자지 밖에 보지 못했다. 이놈」
이 광경을 지켜보던 주위 승객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박장대소하며 통쾌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전도사는 얼굴이 빨개진 채 서둘러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하나 거침이 없었으니, 그의 진면목을 모르는 사람들은 당황하기 일쑤였다. 그의 행동이나 언행 중엔 차마 수행인의 것이라고 보기 어려운 음담패설도 많았다. 그러나 그 내용을 가만히 음미해 보면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삶의 골수를 찌르는 촌철살인의 법문이었으니, 수많은 운수객들이 욕설 세례를 받는 줄 알면서도 그의 회상에 모여든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춘성은 자기 삶을 꾸미거나 조작하려고 하지 않았다. 태어날 때의 원초적인 모습대로, 그리고 하늘과 양심을 우러러 거리낌 없게 살고자 했다. 본래 자유로운 자아의 표출을 통해, 속박된 삶에서 비롯된 가식과 꾸밈 등의 굴레와 당당히 맞서 싸웠다.
그가 보여준 삶의 모습들은 허상과 거짓으로 굳어진 일반적 삶의 측면에서 본다면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지각없는 행동이라고 비판하는 이도 있었고, 지나친 원색적 발언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춘성의 악설은 위선에 젖어 살아가는 중생들을 일깨우는 신묘한 힘을 갖고 있었으니, 단순히 그를 기승이라고 폄훼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천편일률적인 삶을 살아간 거개의 선사들과는 달리 기존의 수행 방식을 과감히 역행해 자기 존재의 핵심에 도달한 선지식이었던 것이다.
평범함을 떠난 삶은 고독을 수반하게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혼자인 경우가 많았다. 자신이 택한 삶이 기존의 수행 방식과 유리되는 것을 수차례 목도하면서 견디기 힘든 하중으로 밀려드는 인간적 번뇌를 감수해야 했다. 어느 분야에서든 선구자의 삶이 고독하듯이 그 역시 뼛속 깊이 스미는 고독함과 외로움을 감내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예사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외로움을 완전한 자기완성의 계기로 삼았으니, 그에게 외로움이 주는 고통이란 곧 삶 속에 편재된 번뇌라는 불순물을 주사 바늘로 모조리 뽑아내는 고행이요, 용맹 정진이었던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춘성이 이뤄낸 경계는 나고 죽는 벽을 깨끗이 부수어버린 대자우, 바로 그것이었다.
적나라한 문구를 쏟아내고 서슴없이 행동했지만, 그것에서 느껴지는 것은 삶의 어둠에 갇혀 있는 자유가 아니라 일체의 가식을 벗어난 본질적인 자유였기에 많은 후학들은 춘성을 통해 비로소 진리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욕쟁이 스님>으로 불릴 만큼 입이 걸었던 춘성이었지만, 그의 입을 통하면 욕설이나 상소리도 곧 해학이 되었고, 더운 여름날 소나기 같은 청량 음으로 변했다.
장성한 딸을 둔 노 보살이 있었다. 딸의 소견이 좁은 것을 염려한 이 보살은 딸을 춘성의 처소로 보내 법문을 청해 듣도록 했다.
보살의 딸을 본 춘성이 대뜸 말하길 「내 그 큰 것이 네 그 좁은 데 어찌 들어가겠느냐?」고 했다.
순간 딸은 얼굴이 벌게지면서 방문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집으로 돌아온 딸은 어머니에게 법문 내용을 사실대로 전했다.
그러자 노파는 「스님은 엉터리」라고 푸념을 늘어놓는 딸을 호되게 야단쳤다.
「아이구 이것아 네가 그래서 소견이 좁다는 것이야. 큰스님의 법문이 네 쪼그만 소견머리 속에 어찌 들어가겠느냐」
어머니의 말을 듣고서야 딸은 소중한 법문을 잘못 알아들은 것을 마음 깊이 참회했다.
통금제도가 실시되던 시절, 어느 날 춘성은 통금 시간에 밤길을 가다가 순찰중인 경찰과 맞닥뜨렸다.
「누구요?」경찰이 물었다.
춘성이 「중대장이다」라고 했다.
경찰은 노인의 목소리가 들리자 손전등으로 춘성을 비추며 살폈다.
「아니, 스님이 아니시오?」
「그래! 그러니 내가 중의 대장이지. 맞지?」
춘성의 이야기를 들은 경찰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박장대소하더니, 그냥 자리를 떴다.
한국 전쟁이 끝난 후 폐허가 된 망월사에 혼자 남아 있던 춘성은 절을 중수하기 위해 허가도 없이 벌목을 하였다가 의정부 영림서로부터 출두 명령을 받았다.
춘성이 영림서에 들어가니 마침 서장이 조서를 작성하기 위해 이것저것을 물었다.
「본적이 어디요?」
「우리 아버지의 신두(腎頭, 남자의 성기)요」
「그것 말고 스님의 고향이 어디냔 말이요?」
「우리 어머니 보지요」
서장은 조사를 포기하고 춘성을 방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 대통령 부인인 육영수 여사의 생일을 맞아 작은 법석이 마련된 적이 있었다.
당시 이름 있는 스님들과 고관대작의 부인들이 법석을 가득 메운 자리에서 춘성은 법좌에 올라 설법을 시작했다.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아는가. 여기 육영수 보살이 지 어미 뱃속에 들어갔다가 ‘응아’하고 보지에서 나온 날이다」
춘성이 강화 전등사에서 주석할 때의 일이다.
전등사는 천혜의 조건을 두루 갖춘 수행 터였으나 이상하게도 승려들이 여색에 빠져 파계를 저지르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춘성은 이런 일이 전등사의 지세가 음기가 강한 형국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임을 파악하고, 풍수지리학적으로 여성의 음부에 해당하는 작은 연못에 소나무를 심도록 했다.
못 한가운데 심은 소나무가 별 탈 없이 잘 자라는 것도 의아한 일이었지만 이후 전등사에서는 승려가 파계를 저지르는 일이 사라졌다.
육두법문(肉頭法問), 평범한 일상의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원색적 삶을 말해 주는 이 일화들은 춘성이 아니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적재적소에 번뜩이는 선지(禪旨)를 펼쳐 놓은 활구법문(活句法問), 살아 있는 법문이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 일 것이다.
춘성은 이렇듯 호호탕탕한 자유인의 해탈 경계를 거침없이 드러내 보였다. 듣기 거북한 욕설이라고 하더라도 중생들이 그를 통해 참다운 경계를 확연히 알아차릴 수 있다면 마다하지 않는 성정, 이것이 어찌 중생을 사랑하는 지극한 마음의 표출이 아니겠는가.
어느 겨울날 춘성은 지금의 창경궁 정문 앞을 지나다가 공중변소 앞에서 떨고 있는 초로(初老)의 남자를 만났다. 궁색한 행색에 옷조차 제대로 입고 있지 못한 것을 본 춘성은 지체 없이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어주었다.
속옷만 달랑 걸친 알몸이 된 그는 대낮에 거리를 다닐 수가 없어 공중변소 안에서 날이 어둡기를 기다렸다.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춘성은 남이 볼세라 혜화동 로터리를 지나 성북동의 한 비구니 절로 달려가 문을 두드렸다. 비구니들은 혼비백산해서 서둘러 장삼을 가지고 나왔다.
자초지종을 전해 듣고서야 비구니들은 감동을 하고, 따뜻한 밥과 국을 대접하고 밤새 춘성이 입을 의복을 지었다. 춘성은 새로 지은 옷을 입으면서도
「헐벗고 굶주린 중생들이 이 추위를 어떻게 견딜 고.....」라며 중생들에 대한 걱정을 멈추지 않았다.
춘성은 제자 교육에도 남다른 면이 많았다.
새벽마다 「천수경」, 「관음예문」,등을 한 시간 넘게 절이 떠나갈 정도로 쩌렁쩌렁하게 읊는 고성염불(高聲念佛)을 빠뜨리지 않았는데, 이것을 제자들에게 그대로 전수시켰다. 간혹 염불 소리가 낮아질라 취면 귀신처럼 따라와 제자의 등짝을 두드리며 「더 크게, 더 크게」라며 격려했다. 춘성의 하나뿐인 상좌 견진은 훗날 은사의 고성 염불 교육이 혈기 넘친 젊은 제자의 양기를 잠재우는 방편이었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춘성은 평상시에 부드럽고 자애한 모습을 보이다가도 제자에게 공부를 가르칠 때른 갈기를 곧추세운 사자처럼 무서운 면을 보였다. 참선을 하다가 제자가 조는 기색이 보이면 어느새 달려와 사정없이 발길질을 해댔다.
그러나 같이 참선 정진을 하는 제자에게 「이 꼭 맞물어라. 꼭 맞물어라」라며 자상한 가르침을 아끼지 않았다.
그것은, 춘성 자신이 3년간의 장좌불와 수행에서 치아가 모두 빠져버려 틀니를 해야 했기 때문에, 제자에게는 이가 솟지 않도록 미리 주의를 준 것이었다.
무애적 자유를 맘껏 구가한 춘성의 일생은 갇혀진 자유가 아니라 나고 죽는 경계를 철저히 부순 후에 누리는 진정한 자유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무소유 정신을 철저히 지켜 정신적으로는 누더기조차 없는 알몸으로 살았던 당대의 걸출한 기승(奇僧). 그가 입적하자 당시의 조계종 종정 서옹 화상은 선문의 거목을 잃은 슬픔을 이렇게 읊었다.
춘성 노사 노니신 곳
삼세의 부처조차 엿 볼 수 없도다.
이 세상에 걸림 없이
한바탕 진탕 치고 어데로 가시는고.
서울 가두에 전신을 나누시도다, 돌.
춘성(春城) (1891-1977) 스님
1891년 강원도 설악동에서 출생
1903년 백담사에서 한용운 스님을 은사로 득도
1915년 안변 석왕사 대교과 수료
1930년 덕숭산 만공 화상에서 안거
1960년 도봉산 망월사 주지
1977년 세수 87세, 법랍 75세로 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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