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순례후기

해인사 순례(10)-장경각

덕산연담 2009. 4. 5. 21:17

 

 

불국사를 떠올리면 다보탑이 생각이 나듯 해인사하면 '팔만대장경'이 자연스럽게 떠올려진다. 그러면서 그것이 고려시대임을 생각하면 조선시대를 훌쩍 뛰어넘어 아득한 과거로 시간이 돌아간다. 역사책에서 배웠듯이 조선과 고려는 완전히 구별되는 다른 문화를 가진다.

 

신라에서부터 불교를 근간으로한 문화가 꽃을 피우던 고려가 후반기에 들어 불교때문에 어려움을 격는다.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바람이 결국에는 조선이라는 왕조를 탄생시키고, 불교 대신에 유교라는 새로운 이념으로 근간을 세우고 그 동안 이룩한 불교의 문화를 부정하기 시작한다.

 

토지 개혁을 통하여 불교의 재산을 몰수하고, 기득권 세력인 불교를 부정하기 위하여 최 진보 세력인 '정도전'을 중심으로 불교 폄하 내지는 무력화를 시도한다. 그러한 노력은 조선시대를 걸쳐 전반적으로 진행이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스님의 도성출입금지, 절에서 세금공출, 스님들의 숫자제한등이 대표적인 정책들이다.

 

그런 모진 풍파를 견디어내고 지금 여기까지 우리 곁에 남아있는  고려시대 제작된 목판 대장경은 위대하다고 해도 표현이 모자르다. 그 판을 쓰고 새긴 사람들의 정성이 그러한 에너지를 간직하게 한 것이라 믿는다.

 

-가장 판의 숫자가 많아서

-가장 글자가 정확해서

-가장 구성이 완벽해서

 

수많은 대장경이 있지만 위대한 유산으로 유네스코가 후대에 꼭 물려주어야하는 보물로 선정을 하였다고 한다.

 

아침 일찍 절을 둘러보니 대장각에 올라가는계단을 막고 임시로 통행로를 놓았다. 그것을 보니 마음이 덜컹내려 앉는다. 공사중이거나 보수중이라 출입이 안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온김에 보고싶은데...

 

다행이도 출입은 허락이 되었다. 그 계단을 보수중인가 보다. 언제 왔는지 수많은 학생들...일본 관광객이 뒤섞여서 완전 시장통이 되어 버렸다. '문화재 해설사'라는 제도가 있어서 각 그룹은 그 해설사의 안내에 따라 설명되고 있었다. 학생들의 진지한 얼굴과 해설사 아가씨의 이쁜 목소리가 잘 어울린다.

 

우리는 해인사 스님의 인솔하에 해인사 구석구석을 안내 받는 영광을 누렸다. 구수하고 유머스러운 스님의 설명에 썰렁한 봄바람 추위를 우리는 웃음으로 날려 보냈다. 내 마음은 이렇게 간사한가 보다. 새벽예불에 느낀 마음의 냉냉함은 사라지고 친절한 스님의 설명에 감격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스님을 따라서 들어선 장경각은 '단아하다'는 첫 느낌이다. 두줄로 나란히 집을 짖고 바람구멍이 서로 뒤바뀌게 만들었다. 소금과 점토와 석회를 섞어서 바닦을 만들었다는 지혜로움...습기나 해충으로 부터 경판을 보호하였다는 과학적인 고려인들의 지식에 감탄을 했다.

 

완장을 찬 경비원이 사진 촬영금지를 나에게 알려온다. 오~~네...그럼요 내가 찍는 사진이 우리 경판에 해가 된다면 절대로 안찍는다는 다짐으로 얼른 카메라를 가방에 넣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난 우리들의 그 곳 사진을 키페자료실에서 발견하였다. 바로 이거다. 하하하...

  

 

처음 우리 모임에 오신 법우님이 나에게 묻는다. 경판이 무엇이냐고...허허 이런~~난 순간 또 한문을 사용하는 불교의 한계를 느낀다.  '나무에 부처님 말씀을 새겨서 그 것에 먹물잉크를 바르고 판화처럼 종이에 찍어내는 것'을 줄여서 경판이라고 한다고 설명을 해주니 그제서 얼굴이 핀다.

 

그래도 내가 더 설명을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 법우를 모시고  나온 곳을 돌아서 다시 장경각을 들어갔다. 거기서 경판에 인쇄한 종이를 기념품으로 파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반야심경을 한장에 오천원에 판다. 그리고 그 반야심경의 목판을 유리판에 기대어 놓아서 자세히 볼 수가 있었다. 2장을 사서 한장을 그 법우님께 드렸다.  이제는얼굴에서 웃음 꽃이 핀다.나도 마음이 넉넉해진다.

 

나에게는 또 한장의 목판 인쇄된 반야심경이 있다. 그러나 하나를 더 살걸~~그 생각이 든다. 광주에서 처음 왔다고 나에게 인사를 한 어젯밤 우리조에서 함께 한 골든벨 멤버를 보니 그 생각이 들었다. 백련암에 오를때 불교를 처음 접한다는 고백을 한 법우인데...기념품을 만들어 주고 싶은데...

 

이미 내 손은 그 법우에게 그 목판 반야심경을 내주고 있었다. '주고 싶어서 샀다'는 말과 함께... 그 법우님의 고맙다는 인사가 너무 큰 소리라서 난 쑥스러웠다. 아무쪼록 반야심경은 '평화로운 삶'을 사는 방법을 세세하게 가르치고 있으니 멀지 않아서 그런 지혜가 그 법우에게 생기길 빌어본다.

 

...반야심경을 한문으로 사경을 근 1년을 한적이 있다. 스님의 권유도 있었고 매번 법회나 예불에서 빼놓지 않고 하는 경이니 만큼 반드시 경에 숨은 의미를 알고 싶었다. 더구나 매일 독송을 하지 않으니까 법회에서도 종종 틀리는 경우도 있고 자신이 없어지면 큰 소리로 독경이 않되니 겸사겸사 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볼펜으로 근무하다가 시간이 나면 하루에 한번을 노트에 적었다. 그 다음은 붓펜으로 해보고, 그 다음은 종일 집에서 붓에다 먹물로 써 보았다. 그렇게 끝이 달아서 없어진 붓이 한 다발이 넘는다. 우연히 내가 쓴 글을 본 서예 공부한 친구가 칭찬을 하두해서 몇장을 표구해서 선물을 준 적이 있다. ...

 

법우님아~~목판 인쇄된 반야심경에서 '무-無' 또는 '공-空'자가 보이거든 얼른 마음을 돌이켜서 '내가 없음'을 중국말로는 그렇게 쓰는구나하고 알아두면 좋을 것 같다. 얼마나 많이 그런글자가 보이는지..얼마나 많이 나를 죽여야 되는지...한번 세어보구려...나를 죽이면 아마 '자비심'이 얼굴을 환히 드러낼걸???

 

자비심의 극치를 설명한 금강경의 구절을 적어봅니다.

 

 ....

"내가 끝까지 잘 참고 견뎌내지만

실제로는 끝까지 잘 참고 견뎌낸다고 할 수도 없다.

일찍이 칼링가(Kalinga) 왕이 내 몸과 팔다리에서 살을 도려 낼 때에도

나에게는 '나'라는 생각도

'남들과 나누어진 나'라는 생각도

'살아있는 영혼을 가진 나'라는 생각도

'목숨을 가진 나'라는 생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에게 '나'라는 생각이 있었다면

나는 틀림없이 분노의 마음을 먹었을 것이다."

 

"보디사트바는 이렇게 이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위해 베풀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각각의 살아있는 것들이란 생각은 단지 생각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이 각각의 살아있는 것들은

실제로는 하나하나 나뉘어져 있는 게 아니다."

.....

 

 티벳에서 지금도 중국과 독립을 위해 수많은 스님들이 인민군과 맞서서 투쟁을 하고 있다. 달라이라마 성하의 책을 읽다가 그 분이 존경하는 스님의 이야기가 잠깐 나왔는데...어린 인민군에게 모진매를 맞고 감옥에 계시는 그 스님을 찾아가서 면회를 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데 내 기억에 이렇다.

 

라마: 스님, 고생이 너무 심하십니다. 어떻게 위안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스님: 성하..이렇게 와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잘 지내시죠?...난 잘 지낸다오. 단지  

        걱정은 '내가 나를 핍박한 젊은 인민군 친구를 미워하는 마음이 생길까'

        하는 우려입니다.

라마:(그저 눈물만 흘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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