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이라는 거창한 말은 너무나 사람들의 삶이 복잡하기에 그 것과 구별하기 위해서 이르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쉽게 말하면 복잡한 삶의 방식을 단순화 시키는 것이다. 말을 적게 하고, 눈으로 조금 보고, 생각을 멈추는 일을 반복적으로 연습하여 자기의 습관으로 만드는 일이다. 수행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고 깨달음은 먼나라 이야기 일까?
아니다. 정말 아니다. 석가모니 출현 전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다. 왜냐구?
사람의 특성 중에 자기가 아는 것을 누군가에게 가르치고 싶은 욕심이 있다. 자기가 어렵게 배운 것을 어떻게든 쉽게 다듬어서 다른 사람은 자기와 같은 시행착오를 하지 않도록 배려를 한다. 모든 책의 내용이 그렇고 모든 가르침이 그러하다. 책이 훌륭하면 할수록 그 글을 쓴사람의 노고가 많다. 찐한 고생이 녹아있다.
수행이라는 것도 그러하다. 최초에 흰두교의 바라문식으로 고행을 방편으로 수행을 하던 석가모니도 이런 저런 과정을 거쳐서 깨달음을 얻기 까지는 엄청난 희생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에는 고행을 추천하거나 어렵게 무엇인가를 하는 것을 수행이라고 말씀하지를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수행이라고 거창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만들어낸 우리들의 작품이다. 좌선을 한다거나, 단식을 한다거나, 묵언(말을 하지 않음)을 한다거나, 잠을 자지 않는다거나....흔히 수행의 방편으로 이야기되어지는 그 모든 것은 꼭 그래야만 깨달음을 얻는 필수조건이 아닌 추천사항에 불가하다.
그렇게 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깨달아서 '평화로운 삶'을 살 수가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불경(석가모니 부처님의 어록)을 읽는 것이다. 깨닫고 난 다음에 그 제자들에게 일러주는 내용은 자비로움이 듬푹담겨 있다. 행간에서 느끼는 지혜로움은 눈물없이는 읽지를 못한다.
만일 그대가 깨달음을 얻은 석가라면 그대가 겪은 어려움을 그대로 하라고 말하겠는가? 아니다. 그렇게는 못한다. 나는 어리석어서 그랬다고 고백을 할 것이고 쉽게 이렇게 하라고 일러 줄 것이다. 그렇게 일러준 내용이 경(經, Sutra)이다.
매일, 시간이 날때마다 경을 읽어보라. 거창한 수행이 아니다. 마음 가득 그 분의 깨달음의 향기를 받아 들여보라. 이미 그대는 거룩한 깨달음의 성자가 되었느니라...
....어떤 표시를 가지고 있다면 그 것은 거짓이며, 아무런 표시도 갖고 잇지 않을때 그 것은 거짓이 아니다. 따라서 '깨달은 자'는 '아무런 표시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 그의 표시여야 한다.....(금강경 중)
자꾸 읽으면 그 분의 말이 수긍이 간다. 그 분은 아주 쉽고 친절하게 요점을 말해 주신 것이다. 그 친절함과 자비로움에 다시 머리를 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