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죽이기

꺼꾸로 보기

덕산연담 2012. 6. 16. 18:07

산에 올라서 밑에를 보면 내가 사는 집이 너무나 작아서 피식 웃는다. 잘 보이지도 않는 사람들의 움직임 너무나 개미와 흡사해서 내가 개미정도였던가 하고 나의 존재감을 상실한다. 내가 그토록 힘들게 고민하던 모든 일이 너무나도 부질없음에 다시금 힘을 얻는다.  내가 산을 바라볼 때와 다시 내가 산에 올라서 바라볼 때 그 느낌은 정말 다르다. 

 

모든 것이 그러 하지 않을까? 내가 나를 중심으로 바라보는 것하고 내가 다른 사람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 하고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뉴스에 나오는 엄청큰 사건 사고는 그렇구나 그런 일이 있구나 하면서도 내가 당한 아주 사소한 사건도 엄청 심각하고 고민이 된다. 기준점이 어딘가에 따라서 이렇게도 큰 차이를 보인다.

 

아픔도, 또한 죽음도...나를 기준으로 보면  참으로 슬픈일이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기준을 달리하면 한편 즐겁고 유쾌한 일일 가능성도 있다. 모든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삶의 마지막 장면을 그릴때, 언제나 달콤한 꿈이나 상상의 세계로 동화 속에서 마감을 하도록 한다. 아주 동감이 간다. 다른 사람이 바라보는 죽음은 슬픈 것이지만 정작 본인은 그 것이 죽음인지, 꿈인지 아니면 세상에서 처음 느끼는 아주 달콤한 행복인지도 모른다.

 

처음 유인 우주선을 탄 소련 우주인의 유언이 얼마전에 공개된 적이 있다. 살아서 다시 온다는 보장이 없기에 유언을 육성 녹음을 해서 보관한다고 한다. 더구나 처음으로 사람을 태운 우주선이었으니 살아서 온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녹음 내용이 참으로 소박하다. ...수많은 사람이 교통사고로 죽는데, 나는 이 우주선에서 마지막을 맞이 한다면 영광이라는 내용이었다.

 

아픈 친구가 적어 내려간 심경을 읽노라니 벌써 우리가 그런 나이가 되었나 되돌아본다. 아픈 이유가 있으리라. 내 욕심을 채우지 못해서 생긴 분함이, 그 어려움이, 부족함이 아마도 몸을 병들게 했을지도 모른다. 능력 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루려는 생각이 몸에 무리를 가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랴...이렇게 살아온 그 흔적인 것을.

 

적당한 거리에서 나를 바라보는 경험을 축적하는 일이 조금은 넉넉한 삶이 되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