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의 소중함
'족보'-가족의 내력을 적은 역사서가 요즘은 천대를 받는다. 그러나 조선시댁에는 족보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귀족과 평민의 구분이 되었다. 족보가 있으면 자랑거리이고 명문가이었다. 오죽했으면 족보를 사고 팔았을까~!
왜? 그 당시에는 그렇게 족보를 중요시하고, 목숨처럼 간직을 했을까? 이사갈때 제일 먼저 챙기는 보물1호가 족보였다면 믿어지는가? 집에 불이나면 사람은 구하지 못해도 족보는 구해야 한다고 불길을 뛰어든 사람이 있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그리고 족보는 무슨무슨 파(예로, 덕제공파)로 나뉘어서 묶는다. 왜 그럴까?
청안 향교의 전교를 지내셨던 아버님의 유물을 챙기다가 우연히 발견한 옛날 족보와 성균관에 제출하는 공적서를 읽어보니 모든 시작은 족보이고 조상이었다. 조선시대의 계급사회는 기득권 세력의 횡포가 너무나도 심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계급사회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사회주의를 신봉하고 개혁을 외쳤을까? 그 당시 젊은 사람을 이해 할만 했다. 일본시대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철저하게 그 계급사회가 무너졌기에 우리는 지금 이런 자유와 평등 그리고 풍요를 누리는 것이리라.
성균관에 제출하는 공적서의 시작은 이렇다.
이 사람의 35대 선조 무슨무슨 공은 그 시대에 과거에 급제하여 나라에 전쟁이 나서 적을 무찌러서 위태로운 나라를 구하고 충성을 다하여 임금이 무슨무슨 공으로 시호를 내린 집안으로....몇대에는 열녀가 있었으며 몇대에는 효자로 3년간 묘소를 다녀서 효자상을 탄 누군가 있었고...이런식으로 약 2페이지를 적어나간다.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소개한 다음 비로서 본인의 이름과 나이 그리고 공적을 소개한다.
앞에 조상이 훌륭하지 못하면 아예 작성이 불가능하다. 역적의 자식이나, 서자 출신이나...출생이 그러하면 아무리 나라에 공적을 세워도 상을 주지 않는다. 제도적으로 접근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족보가 없으면...자기가 낳은 자식의 진로를 막아버리는 격이다. 참으로 무섭다. 나라에서 최근에 그것도 더 훌륭한 일로 시호를 받은 사람이 나온다면 당근 족보를 그 사람을 중심으로 다시 꾸린다. 그래서 무슨무슨 공파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면 그런 공적서를 받은 조정에서는 그 본인의 공적은 그만 그만하니까...결국은 훌륭한 조상을 둔 놈이 상을 타게되는 경우가 다반사가 된다....그래서 왈..조상을 잘 둔 덕이라는 말이 나온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