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와 자비
지혜와 자비를 문수와 관세음이라는 사람으로 의인화하여서 수행의 근본으로 삼는다. 수행이란 사람의 일반적인 관습을 벗어나서 늘 즐겁고 늘 깨끗한 삶을 완성하기 위한 과정이다. 수행을 완성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하는 방법이 당장 눈앞의 문제로 다가온다.
고행을 할까? 무일푼의 거지로 살까? 책을 많이 읽을까? 기도를 열심히 할까?...수행을 하는 사람의 수 만큼이나 그 방법은 많다. 그런 수행의 방법은 모두가 둘중에 하나에 속한다. 지혜 수행이거나 자비수행이다.
한국에서 강조하는 방법은 대부분 '지혜'수행을 근본으로 한다. 즉시 깨달으라는 것이다. 마음을 돌리라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가를 참구하여 찾아내라는 것이다. 내가 누구이며 마음이 무엇인지를 안다면 곧 지혜가 생겨서 늘 상락아정의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다.
한편, 티벳에서는 대부분을 '자비'수행에 의존한다. 늘 기도하고 마음을 늘 선하고 자비롭게 가지려고 노력을 한다. 중생들과 함께하고 수행처가 신도들로 넘쳐나고 스님은 곧 자비의 화신이고 그들을 의지하면 모든 걱정이 없어진다. 스님은 늘 신도를 위해 기도하고 자비를 설한다.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 설득이나 논쟁으로 부처님의 깨달음을 전하지 않았다. 그냥 모습이 거룩하고 행동이 자비스럽고 저절로 우러러 보이는 분위기에 다른 수행자들이 머리를 숙이고 부처님의 수행방법을 따랐다고 한다. 묻기전에는 설법을 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 전통은 이어져서 우리도 법회를 할때는 청법가를 한다. 스님은 원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청해서 하는 것으로 의식을 치른다.
결국 부처님은 '자비'를 더 많이 말씀하셨다. 그것이 지혜보다 값지고 어렵기 때문이다. 지혜는 혀와 머리로 그 많고 적음을 나누지만 자비는 몸과 마음으로 표현을 해야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에서도 지혜보다는 자비가 넘치는 그런 수행자가 넘치기를 바래본다. 그래야 더 살기가 좋은 사회가 될터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