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산연담 2009. 1. 19. 12:01

집을 만든다고 하지 않고 집을 짖는다고 한다. 그 이유는 계획을 우선 세워야지 집을 짖는다. 우선 집의 목적과 크기에 맞게 잘 설계를 해서, 좋은 땅을 사고 재료를 준비하고 기술자를 구해서 마침내 완성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방을 꾸민다던가 주방을 만든다던가...꾸미거나 만드는 것은 언제나 변경이 가능한 일을 하는 경우이고 짖는다는 말은 고치기가 어려울 때 쓴다.

  

우리가 늘 고민하는 '죄罪'라는 것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짖는 것'이다. 그러니 스스로가 계획을 하지 않고 하는 것이 죄가 되지는 못한다. 지금 내가 지금 느끼는 죄가 있다면 그것은 계획을 한 적이 있고 일단 죄를 느끼는 한에 있어서는 쉽게 잊어지지가 않는 특성이 있다. 마치 집을 부수기가 어려운 것 처럼.

 

나는 지금 죄를 짖고 있나? 나는 지금 해서는 안되는 것을 알면서 하고 있는냐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생각에 갖쳐서 자유롭지가 못하다. 내가 계획하지 않은 것이라면 마음에 가책이나 불편함은 없다. 엄밀하게 말해서 그것은 죄가 아니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말을 들었다.

 

불에 달구어진 쇠막대가 있다고 하자. 그것은 뜨겁다 그래서 화상을 입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서 만지는 사람하고 그런 사실을 모르고 만지는 사람하고 그 결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물론 알고서 만진사람이 더 낫다는 말이다. 그러니 알고서 짖는 죄는 그 결과를 알기에 큰 죄는 짖지를 않는데, 모르고 저지르는 죄는 훨씬 더 큰 죄를 지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로 해석이 된다.

 

지금 나는 어떤 불편함을 마음에 간직을 하고 사는가? 그것이 내가 모르고 계획한 바가 없는 것인가 아니면 계획을 한 것인가? 모르고 한 것이라면 운명이라 생각하고 크게 웃고, 계획된 거라면 큰 죄가 아니라고 위안하고 웃어버리자.

 

그렇지만 죄는 꼭 조만간 그 댓가를 치룬단다. 착한 일을 한 것은 통장에 저축하듯 쌓이는 것이라 내가 안찾고 후손이라도 찾을 수 있는 데, 죄는 저축성이 아니라서 즉시 또는 잠시후 내게 돌아 온단다. 이 또한 절묘하지 않은가?

 

누군가에게 물었다.

 

어떻게 사는게 착하게 사는 것입니까?

 

대답은 쉽고 간단했다.

 

악하게 살지 않는거다....하하